쉬어가는 이야기 — 융이 주역에 빠진 까닭
서양 심리학자가 시초(蓍草)를 집어 든 날
스위스에서 19세기 말 태어난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심리학의 토대를 쌓은 인물입니다. 본인이 사회복지사 자격 공부를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저명한 심리학자 4명(프로이트,에릭슨,아들러, 그리고 융)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생애 후반, 머나먼 동양의 고전 『주역(周易)』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융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주역을 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초(蓍草) — 가는 산가지를 이용하여 괘를 뽑는 시초법을 갈대로 직접 실험하면서, 그 결과가 던져주는 메시지의 정확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방식으로 이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신기한 일치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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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무의식과 동시성 원리
융이 내놓은 설명의 핵심은 두 가지 개념입니다.
첫째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개인이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개인 무의식) 너머에 또 다른 층이 있습니다. 인류가 공유하는 오랜 진화의 역사가 담긴 무의식의 저장소. 융은 이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해온 시간의 궤적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 심층의 층에서는 문화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동시성 원리(Synchronicity)**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들, 그러나 너무나 의미심장한 나머지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있습니다. 융은 이것이 인과(因果)의 법칙과는 다른, 동시성이라는 또 다른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건이 원인-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동시에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초법은 바로 이 두 원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잡념을 비우고 집중하여 산가지를 나누는 그 과정에서, 점을 치는 사람의 의식은 집단 무의식의 층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동시성의 원리로 인해, 그 순간 나온 괘의 메시지가 점자의 현실 상황과 의미 있게 공명한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 예언이 아니라, 깊은 심리적 공명(共鳴)의 현상으로 점술을 해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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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는 거울이다
융의 설명은 점술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놓습니다. 점은 미래를 신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점을 치는 사람이 이미 심층에서 알고 있는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괘는 바깥에서 오는 답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 시각은 주역이 전통적으로 강조해온 한 가지 원칙과 맞닿아 있습니다. 점을 치는 사람의 덕(德)과 의도가 점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도덕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먼 자가 그 어떤 길괘를 받더라도, 그 길함은 그에게 실현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렵고 위태로운 괘사(爻辭)를 만났더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나아간다면 위기는 전환점이 됩니다.
주역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괘도, 절대적으로 나쁜 괘도 없습니다. 괘는 상황을 보여줄 뿐이고,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오롯이 사람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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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세심경(洗心經)이라 부르는 이유
주역에는 오래된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세심경(洗心經), 즉 마음을 씻는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사욕(私慾)과 과욕(過慾)을 내려놓고 공정하고 순수한 마음을 회복할 때, 비로소 자연의 이치를 알아보는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특별한 신비 능력이 아니라 맑아진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융이 시초를 손에 들고 실험을 반복하면서 발견한 것도 결국 같은 지점입니다. 조용히, 잡념 없이, 정직하게 자신의 질문을 마주하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마음을 씻는 과정이라는 것. 답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 시간이 사람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만든다는 것.
본 서비스에서 육효점을 풀어볼 때도, 이 점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결과를 따르는 것보다, 질문을 품는 시간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극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빠르고 간편하게 서비스를 기획할 수도 있었지만 다소 사용자에게 수고로운 행위를 강제하고 시간이 걸리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이 느림의 미학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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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당신이 원하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거울이 쓸모 있다." — 복길